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산 폭격 (문단 편집) == 전개 == || [[파일:1280px-Korean_War_bombing_Wonsan.jpg|width=400]] || [[파일:external/www.warmemo.or.kr/0160.jpg|width=400]] || || 폭격을 받고 있는 원산시 || 1950년 10월경 원산 시내 || >"미 함정은 원산을 밤낮없이 폭격했다. '''하나의 도시를 두고 그토록 함포와 공중 폭격으로 두들겼던 사례는 아마도 그 어떤 역사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.''' 원산에서는 길거리를 걸어 다닐 수가 없었다. 24시간 내내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 수 없었다. 잠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." >---- >미국 해군 소장 [[올리버 스미스]]의 증언[* [[브루스 커밍스]], 『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』, 창비, 2001, 158-159쪽.] >"미군은 7월 6일과 13일 두 차례에 걸쳐 원산에 폭격을 감행했는데 그중 13일의 폭격은 가장 심한 것이었다. 미군이 그날 아침에 500톤의 폭탄을 구름 위에서 주택구역을 선택하여 투하한 결과, 1,249명이 희생되었다. 그 가운데 195명은 여성이었고, 125명은 어린이였고, 122명은 노인이었다." >---- >『조선인민보』 1950년 7월 26일자 기사[* 김태우, 『폭격 :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』, 109-114.] 한국전쟁 초기 미국 공군의 북한 지역 폭격은 적의 병력 및 물자 이동을 차단하는 '차단작전'과 적의 핵심목표를 구조적으로 파괴하는 '전략폭격'으로 이뤄졌다.[* 김태우, 『폭격 :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』, 창비, 2013, 104-105쪽.] 그리하여 미군은 대도시와 공장지대, 철로 등에 대해 무차별폭격을 시행하였는데, 원산은 그중에서도 일차적인 공격 대상이었다. 그 이유는 원산이 중요한 전략요충지였기 때문이다. 원산에는 원산항이 위치하고 있었고 철로가 지나는 곳[* 원산에는 당시 한반도에서 두번째로 큰 열차수리시설인 [[http://encykorea.aks.ac.kr/Contents/Item/E0040695|원산 기관차 공장]]이 있었다.]이었다. 게다가 원산에는 [[석유]]를 취급하는 정유소[* 원산정유공장은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큰 정유소였다.] 또한 위치해 있었다. ||<-4> 미군의 원산 지역 폭격 일지 || || 날짜 || 폭격 대상 || 비고 || || 1950년 7월 6일 || || '''한국전쟁기 첫 폭격''' || || 1950년 7월 7일 || || || || 1950년 7월 13일 || 원산 선착장[br]선착장 근처 저장시설[br]원산 조차장 || [[B-29]] 56대 동원 || || 1950년 7월 22일 || 원산정유공장 || || || 1951년 2월 24일 || 원산항 || '''[[원산항 봉쇄 작전]] 실시'''[br]함포 포격 || || 1951년 3월 19일 || 원산항 || USS 미주리호의 포격 || || 1953년 7월 27일 || 원산항 || '''원산항 봉쇄 작전 종료'''[br]'''정전 1분 전까지 폭격''' || 원산에서 처음 폭격이 이뤄진 것은 1950년 7월 6일로 [[B-29]]가 폭격을 시행했다. 이후 7월 13일 B-29 56대[* 이는 당시 미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 소속 비행기의 98%였다.]가 동원되어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다. 이 때의 폭격으로 원산 선착장과 근처 저장시설의 50% 정도가 파괴된 것으로 추측되며 선착장 부근의 인구밀집지역 또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. 신문 <조선인민보>는 13일의 폭격에 대해 5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며 1,249명[* 여성 195명, 어린이 155명, 노인 122명 포함]이 희생되었다고 보도했다. 이에 북한 외무상 [[박헌영]]은 [[유엔 안전보장이사회]] 의장 말리크에게 공식 항의서한을 보내기까지 했다. 하지만 미국은 이 폭격의 성과를 만족하게 여겼고, 7월 17일에는 가치 있는 폭격물을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폭격 대상에서 제외시키기도 했다. [[1.4 후퇴]] 이후 미군은 다시 북한 지역으로의 진격을 준비하였다.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군사 작전을 지원할 요충지가 필요하였다. 원산은 그 요충지에 들어갔으며 이를 위해 미군은 1951년 2월 16일부터 [[원산 포위전|원산항을 원천 봉쇄]]하였다.[* 이 해상 봉쇄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일까지 이어졌다. 이는 장장 '''861일'''의 봉쇄로서 현대사상 가장 긴 봉쇄 기간이다.] 물론 이 봉쇄 기간 동안에도 원산항을 비롯한 원산 지역에 계속된 폭격이 이어졌다. 폭격은 전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었다. 1953년 7월 27일 [[정전 협정(6.25 전쟁)|휴전협정]] 당일에도 폭격은 계속 되어 '''휴전 1분 전'''인 오후 9시 59분[* 휴전협정에는 일체 규정이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부터 효력이 발생한다고 되어 있다.]까지 폭격이 이어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